un poème

마음을 울린 시를 모아두는 곳.


@laneige_

March 18, 2012 at 4:39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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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금산>중에서 / 이성복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빛 도는 날개를 곧추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 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 하는지를.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에 다름아니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일 테지요. 오, 아름다운 당신, 나날이 나는 잔인한 사랑의 습관 속에서 당신의 푸른 깃털을 도려내고 있었어요.
  다시 한번 당신이 한껏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남으로써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February 10, 2012 at 5:19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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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노루/박목월

청노루/박목월



  머언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름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1:04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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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저녁 당신은 인천에서 맥주를 마시고
나는 서초동에서 맥주를 마신다 당신이 버스를
기다리면 나도 버스를 기다린다 당신은 미국에
있고 나는 한국에 있다 아니 당신은 프랑스에
있고 나는 아프리카에 있다 당신은 부산에 있고
나는 춘천에 있다 아니 당신은 원주에 있고 나는
청평에 있다 당신은 A시에 있고 나는 S시에 있다
밤 열두 시 당신이 호프집을 나오면 나도 호프집을
나온다 당신이 계단을 올라가면 나도 계단을
올라간다 당신이 뒷문으로 나가면 나도 뒷문으로
나간다 우리는 뒷문으로 나간다 우리는 술에
취했다 우리는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온다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오고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오고 아름다운 밤이다 당신은 영국에서
담배를 피우고 나는 한국에서 담배를 피운다 당신이
버스를 타면 나도 버스를 탄다 그러므로 당신과
나는 하나이다

— 당신과 나 / 이승훈

February 2, 2012 at 10:43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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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밤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다 등불 속에서 들려오는 깊은 한숨소리. 귀고리처럼 매달린 문고리를 흔들다 가는 바람 소리. 공책을 메꿔가는 연필소리만 들린다 그리운 게 많아질수록 살기는 더 힘들어지는구나 처마 끝에 가닥가닥 하얀한 주렴을 치고 주렴이 저희끼리 부딪히며 내는 아련한 여운 속에서

나는 왜 받지도 못한 편지의 답서를 미리 써두어야 했던가 모든 길이 끊어진 자리에서 더디게 뻗어오는 눈길 하나를 기다려야 했던가 반질하게 손때가 묻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묵은 사진첩을 들춰본다 하릴없이 귀퉁이가 다 닳은 일기장을 펼쳐본다 지문처럼 찍힌 가파른 내 안의 등고선을 맴돌다, 자작나무숲과 까마귀와 묘지가 있는 언덕을 지나, 불꽃나무 산채에 이르는 눈발

눈발의 그 부르튼 발등이 보이는 날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아래로, 아래로, 눈꺼풀을 쓸어내리던 그 오랜 버릇대로 눈은 내리고 나는 다만 붉은 열매처럼 잘 익은 알등을 켠다 흐린 불빛이 불러다준, 턱없이 커진 그림자와 함께 적적한 한때를 달랜다 부질없이 설레던 불빛이 한결 고요해졌다

— 눈 내리는 밤의 日記 / 손택수

January 31, 2012 at 11:58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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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건 아주 좋아
짧아서 좋아
그 즉시 맛이 나서 좋아
‘나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동정할 수 있어서 좋아
허망해도 좋고
쓸쓸하고 외롭고 춥고
배고파도
그 사람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이 나서 좋아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누가 찾아올 것 같아서 좋아
시는 가난해서 좋아
시 쓰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
그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시 속에 그 사람이 남아 있어서 좋아
시는 짧아서 좋아
배고파도 읽고 싶어서 좋아
시 속에서 만나자는 약속
시는 외로운 사람과의 약속 같아서 좋아

시를 읽어도 슬프고 외롭고
시를 읽어도 춥고 배고프고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슬픔도 외로움도 다 숨어 버려서 좋아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눈에 파묻힌 집에서 사는 것 같아서 좋아
시는 세월처럼 짧아서 좋아

—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 이생진

January 30, 2012 at 12:08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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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멀다고 감기에 든다.
겉으로는 끓는 불덩이지만
사실 나는 속으로 춥다.

온몸으로 기어오르는
침침한 어둠
어둠 때문이다, 감기는.
혹은, 들어부어도 넘치지 않는
하늘에게 미안한 투정 때문이다.

추위는 독바늘처럼 나를 가두고
세상도 그리움도 천리에 세워둔
내 감기는
적막한 이별이다.

기침을 할 적마다 삼켰던 어둠을 토해 낸다.
감기조차 안들면 길고 긴 겨울
나, 대답할 말도 없어.
빨래를 짜듯 전신을 비틀어
한 가락 어둠도 다 몰아내야지.

감기는 이미 몸살 아니다
필생의 작업이다.

흙바람 뒤숭숭한 고기압
망설임도 끝난 저 큰길 어귀로
그가 내려온다.
구원처럼
내 돌출한 이마 위에
다시 깃발을 꽂으러.

— 감기 / 이향아

January 28, 2012 at 12:42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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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 나약한 거니
툭하면 흐느끼고

앙다문 가슴은
어쩌라고

— 봄비, 그대 / 임영준

January 24, 2012 at 8:13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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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서
내가 사는 작은 오막살이집까지
이르는 숲길 사이에
어느 하루
마음먹고 나무계단 하나
만들었습니다
밟으면 삐걱이는
나무 울음소리가 산뻐꾸기 울음
소리보다 듣기 좋았습니다
언젠가는 당신이
이 계단을 밟고
내 오막살이집을 찾을 때
있겠지요
설령 그때 내게
나를 열렬히 사랑했던
신이 찾아와
자, 이게 네가 그 동안 목마르게 찾았던 그 물건이야
하며 막 봇짐을 푸는 순간이라 해도
난 당신이 내 나무계단을 밟는 소리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신과는 상관없이
강변 숲길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 계단, 곽재구

January 18, 2012 at 1:22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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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이맘때 그대에게 편지 쓰는 일을 참 좋아합니다.
마음이 고요해져서, 내 사랑이 가장 힘있고 심오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 곳,
바로 진솔한 내 자아에 가장 깊이 접근하는 듯 느껴지는 까닭이죠.
나는, 이따금 우리들의 사랑이 어느 정도는 이 세상에서 우리 둘 만을 동떨어지게 만든다는
환상을 늘 품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와
둘만 따로 심오한 인생을 살고 있는 듯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도, 설명할 수도 혹은 알릴 수도 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나의 애정은 가장 심오한 순간들 속에서 나를 다른 모든 것에서 떼어놓는 듯 하며
그런 까닭으로 나는 내 영혼과 마음을 전부 다 하여 그대에게,
오직 그대에게만 말을 합니다.

— 월터 베이지핫이 1858년에 쓴 ‘엘리자 윌슨에게 To Elisa Wilson’에서

1:19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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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대에게 꽃을 바치리
매일 아침 그대가 아침을 먹을 떄
그러면 그대 내게 키스를 해 주리
그대 입에 꽆을 머금고
그리고 그대 내게 꽃을 주리
매일 아침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볼 때
꽆을 든 내 모습이 그대 눈에 비치면

— 여름의 시, 헤더 홀든

1:17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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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오후의 소나무 향에 펜을 적셔서 내 그대에게 글을 쓰노니, 이는 내 글을 그대가 호흡할 수 있게, 그리고 내 마음 속에 품은 그대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그대가 발견할 수 있게 함입니다. 글자들은 비취빛 아드리아 해와 해맑은 한여름의 하늘에서 헤엄을 칩니다. 문단과 문단 사이에는 섬들이 있습니다.
…더 앞으로 나아가면 거기엔 비단결처럼 펼쳐진 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비스러운 애무를 느껴보세요. 물고기들이 마침표와 쉼표 사이에서 파닥거리며 수면 위로 튀어오르는 동안 내 그대에게 글을 씁니다. 손의 떨림으로 생겨나고 햇살을 머금어 온기를 지니게 된 돌멩이 한 개가 내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 그 자체입니다, 그대의 시간과 나의 시간.
한 번씩 숨을 쉴 때마다 더 지은 색조로 흘러들어가는 추억들로 정성들여 새긴 돌멩이를 그대에게 소포로 부칩니다.

— 스테파니 준 소렐

1:14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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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를 데리고 창가로 갔다. 그들은 길에서 자신들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서로의 이름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던가! 그들이 기대했던 크나큰 기쁨과 전혀 꿈도 꾸지 못했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은 기쁨들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서로의 마음과 만나기 위해 고심해왔던 일들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서로의 팔에 안기어 고요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 E.M.포스터 전망 좋은 방 A room with a view

January 12, 2012 at 6:05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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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이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January 9, 2012 at 1:28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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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있다, 강은교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흔들리는 바람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이 밟은 아침 햇빛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반짝이는 이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1:27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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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강은교

밤하늘에 긴 금이 갔다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너 때문이다